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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범죄(International Conflict)
시험대에 오른 '국제형사재판소'…"강대국 위한 재판소"
2019-05-28 18:21:10
김지연
▲국제형사재판소과 미국과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사진=ⓒ플리커) 

[라이헨바흐=김지연 기자] 미국과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에 대한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ICC는 집단살해죄, 반인도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 중대한 국제인도법 위반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상설 국제재판소다.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기구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국제사법기구로 꼽힌다.

그런데 그런 ICC를 향해 날을 세우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이들은 ICC가 정치적 혹은 지역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중대 전범들을 제대로 기소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ICC를 향한 공격의 선봉에 선 인물이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볼턴 보좌관은 "ICC가 미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려 한다"며 비난했다. 볼턴 보좌관의 이런 발언은 ICC가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 여부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지난 2017년 11월 ICC 검사들은 미군과 CIA가 2001년 이후 아프간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를 조사하게 해달라고 ICC 재판부에 요구했다. ICC는 지난 2016년 CIA의 주도로 미군이 아프간인들을 대상으로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만약 조사가 시작되면 아프간에서 미군이 벌인 민간인 사살, 불법 구금, 강제 인도 등이 모두 수사 대상에 오른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ICC를 향한 공격의 선봉에 서 있다(사진=ⓒ위키미디어커먼즈)

볼턴 보좌관은 "ICC는 아프간에서 사법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며 "ICC가 아프간 주둔 미군을 조사하려는 행위는 명백한 주권 침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아프간은 123개 ICC 회원국 중 하나다. 미국이 ICC 회원국이 아닐지라도 ICC는 아프간에서 미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ICC의 재판은 관련 국가의 요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부, ICC 검사의 기소 등에 의해 진행된다. 다시 말해 ICC는 해당 국가의 요청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사건을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 측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새다. 볼턴 보좌관은 보수단체 '연방주의자 협의회' 행사에 참석해 "ICC가 아프간 주둔 미군을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려 한다면 미국은 ICC 소속 판검사들을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ICC 판검사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그들의 미국 내 자금을 제재하는 한편 미국 형사법에 따라 그들을 기소하는 동시에 ICC의 미국인 조사를 지원하는 다른 국가와 기업까지 제재할 것"이라고 경고 수위를 높였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볼턴 보좌관의 제재 위협과 관련해 성명을 내고 "ICC는 원칙과 법칙에 따라 업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며 "관련 국가들이 ICC 관할 범죄에 대해 처벌하려 하지 않거나 처벌할 수 없을 때 ICC는 그 범죄를 조사하고 처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ICC는 수사나 재판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전쟁 범죄 억지력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강대국은 외면한 채 아프리카처럼 약소국에서 벌어진 범죄만 다루고 있다는 비난이 가장 뼈아프다. 실제로 최근 몇 십년간 ICC가 재판에 회부한 범죄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다수가 아프리카 지도층이다. 이런 편중 현상은 곧장 반발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ICC는 백인들을 위한 재판소"라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조롱을 넘어 ICC를 중도 탈퇴한 국가들도 있다. 

만약 ICC가 미군을 재판대에 세우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다. 미국이 앞서 경고했던 것처럼 전방위 제재를 가하면 ICC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 남중국해 문제, 미얀마 로힝야족 등 강대국들이 얽힌 중대 사건들이 산적한 ICC에게 미국의 협조는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ICC가 미국과의 정면충돌도 불사하며 '강대국을 위한 재판소'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을지 이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라이헨바흐=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