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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범죄(Homicide)
유럽판 킬링필드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2019-07-30 17:24:31
허서윤
▲1995년에 발생한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은 현대에 발생했던 대량 학살 중 하나다(사진=ⓒ위키미디아)

[라이헨바흐=허서윤 기자] 비인간적인 학살 행위로 지탄받은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은 인류애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레브레니차에서 자행된 유럽 최악의 학살 사건은 전 세계인을 충격에 빠트렸다. 이는 유럽판 킬링필드로 회자되며 인간의 광기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됐다. 

배경

1943년~1980년까지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며 공산 정권으로 이끌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 다양한 인종 집단이 국가를 구성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정통 기독교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카톨릭의 크로아티아, 이슬람교의 알바니아인이 포함됐다.

1990년 초, 마침내 냉전이 종식됐다. 이는 독일에 통일의 계기가 됐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분열의 시작이었다. 이 두 사건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동유럽 전체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됐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세르비아계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마을을 공격해 8,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살해했다(사진=ⓒ플리커)

사건의 발단

1987년 세르비아 지역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사람들의 봉기를 국가 헌법을 바꿀 기회로 이용해 궁극적으로 세르비아인을 위한 법을 만들려 했다. 

심지어 군대 병력 90%를 세르비아계 민족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공동체가, 예컨대 무슬림이 세르비아인의 자유와 평화를 막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를 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은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됐던 유고슬라비아의 군대는 세르비아 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그 후 같은 목적으로 보스니아 지역을 침략했다. 그러나 후에 드러난 진정한 침략 의도는 이슬람교인 보스니아인을 인종적으로 정화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사건 발생

최악의 사건은 1995년 7월에 발생했다.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을 선두에 세운 세르비아 군대가 스레브레니차 마을을 강타하며, 그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마을에는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 450여 명 정도만 주둔하고 있어 세르비아 군대에 대응하지 못했다. 유엔국가인 미국과 유럽도 개입하지 못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이 유대인을 학살한 이래 최악의 인종 학살이 발생했다.

1995년 전쟁이 끝나자, 마침내 나토(NATO)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군대와 함께 개입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들이 사망했고 많은 여성이 강간과 고문을 당했으며 어린아이들까지 죽임을 당한 후였다.

▲국제 사법 재판소는 세르비아가 제네바 협약의 몇 가지 규칙을 위반했음을 밝혔다(사진=ⓒ위키미디아)

세기의 재판

수년의 기소 끝에,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작년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대량 학살 혐의로 수감 생활을 선고 받았다.

'무르타자 후세인'(Murtaza Hussain)은 "믈라디치가 일으킨 잔학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취급했다"며 "심지어 믈라디치 기념비까지 세웠다"고 밝혔다.

1993년 5월, 세르비아 대량 학살이 끝나고 나서야 유엔이 구유고슬로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한다. 이후, 수십 년간의 지속적인 논의 끝에 2001년 스레브레니차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선고했다. 

그리고 2007년, ICTY는 세르비아가 학살을 막을 만큼의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들이 대량 학살 협약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인종 정화 및 대량 학살을 시작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9년 코소보에서 전쟁 범죄와 인신 매매 범죄로 ICTY에서 3건의 기소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 악화로 재판이 여러 차례 연기됐다. 2002년 그는 66건의 전쟁 범죄, 인류에 대한 범죄, 대량 학살에 대해 유죄 인정을 하지 않았다. 

결국, 2006년 그는 헤이그의 감옥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됐으며 ICTY는 그에게 형을 선고하지 못했다.

 

[라이헨바흐=허서윤 기자]